본문 바로가기 상세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LANGUAGE EN 中 日
홈페이지 첫화면으로 계룡시의회 폰트 크기 증가 초기화 폰트 크기 감소

신도안면 연혁

empty

현 신도안면의 대부분 지역은 백제시대 황등야산군, 통일신라시대 황산군, 고려시대 연산현, 조선시대 연산군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논산군 두마면(지금의 신도안리 지역은 대덕군 진잠면)에 편재되었다.

해방이후 신도안에 정감록 사상 등으로 각종 종교단체가 급증하여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62년 5월 논산군 조례 제32호로 두마면 신도내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3년 620사업(군본부 이전 사업)으로 신도내 주민 1,318세대 5,550명이 타지로 이주함에 따라 논산군 조례 제961호(1984. 10. 20)로 두마면 신도내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89년 1월 대전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 제4049호(1988. 12. 31 공포)로 대덕군 진잠면 신도안리(南仙里)가 논산군 두마면(論山郡 豆磨面)에 편입되었고, 군인가족에 대한 행정편의 지원을 위해 두마면 신도안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9년 7월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입주하면서 계룡대 위상에 맞는 행정조직 편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90년 2월 충청남도 계룡출장소가 설치됨에 따라 논산군 두마면 남선출장소는 계룡출장소 남선지소로 변경되었고, 「충청남도계룡시도농복합형태의시설치등에관한법률(제정 2003. 7. 18, 법률 제6929호)」에 따라 2003년 9월 19일 계룡출장소가 시로 승격되면서 계룡시 남선면이 설치되었다.

2009년 5월 21일 남선면이 신도안면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도안의 유래

empty

조선을 개국한 이태조가 새로운 도읍지로 낙점하여 대궐 공사를 벌인 조선초부터 사용된 명칭으로 상정되며,명칭의 이미는 도읍지 안쪽이라는 신도내(新都內), 새 도읍 예정지라는 신도안(新都案), 신정세계의 수도라는 신도안(神都案), 아직 새 도읍지가 안 되었다는 뜻의 신도안(新都안)으로 새기기도 한다.

당초 신도안의 구역 범위는 현 계룡시 신도안면 석계·정장·부남·용동·신도안리와 대전시 유성구 송정동 일부 등 동서 약 4km, 남북 약 3km의 분지를 지칭한 것으로 추정되며,새 도읍 건설 공사의 흔적으로 부남리에 주초석 115개(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가 잔존하며, 신도 공사를 위해 부역 온 사람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어 이루어졌다는 신털이봉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본 신도안 대궐 공사 전말

empty

태조 2년(1393) 1월 2일, 태실증고사 권중화(權仲和)가 계룡산의 도읍지도를 바치자 태조가 1월 19일부터 2월 13일까지 친히 계룡산에 행차하여 신도 예정지의 산수와 형세를 살펴본 후 김주, 박영충, 최칠석 등으로 하여금 신도 건설을 감독케 함으로써 대궐 공사가 추진되었으며,동년 3월 24일, 81개의 주, 현 부곡, 향소를 새 도읍지로 획정하였고, 신도 공사에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서 인부를 차출하는가 하면, 승려들을 동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일, 계룡산의 신도가 조운(漕運) 및 풍수지리상 새 도읍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하윤(河崙) 주장이 받아들여져 대궐 공사가 중지되었다.

관련자료 다운받기

지역의 대표 전설

신털이봉 관련 전설 empty

조선 초 천도를 위한 신도안 대궐 공사에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고, 그중에는 전라도 정읍에 사는 편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농사를 천직으로 아는 사람이었으나 아내가 미색이었던 까닭에 관인의 질시를 받아온 터라 대궐공사 부역에 나가기에 앞서 혼자 남게 될 아내가 걱정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부역기간 동안 친정에 가 있을 것을 권유하였으나 농사일을 걱정한아내는 한사코 집 지킬 것을 고집하였다.

하는 수 없이 평소 아내의 굳은 마음을 믿고 부역에 참여한 그는 늘 아내를 걱정하며 열심히 일하였고, 그러던 중 신도 공사 중지 명령이 내려와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 보니 아내는 보이지 않았고, 수소만하여 찾던 중 아내가 쫓기듯 부역나간 남편을 찾으러 떠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부랴부랴 신도안에 되돌아 왔으나 인적이 끊긴 신도안 어느 곳에서도 아내를 찾을 수 없었다. 편씨는 신털이봉 아래에 뗏집을 짓고 30년이 넘게 곡식을 가꾸며 아내를 기다렸지만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를 잊지 못하고, 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며 늙고 꼬부라져 간 편씨는 결국 신털이봉에서 죽고 말았다.

신도안 신털이봉의 전설은 조선초 신도 공사에 동원된 많은 이들의 애환을 엿보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이 조선초 천도를 위한 도읍터였음을 입증해 주는 구전자료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암용추와 숫용추 empty

옛날 계룡산 땅속에 암용과 숫용 두 마리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그 두 마리 용은 때가 되어 하늘에 오를 날만을 기다리며 계룡산밑을 파서 산의 물을 금강으로 흐르게도 하고, 갑사, 동학사, 마곡사 등 어디든 다니며 다정하게 살았다.

하지만 땅위 여러 곳에 사는 속된 이무기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몸을 땅위에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다만, 하늘이 부르지 않을까 하여 몹시 비가 내릴 때나 천둥이 칠 때에만 굴속에서 얼굴을 내밀어 하늘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비가 몸시 내리는데도 용들은 땅속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느라 하늘의 부름을 듣지 못하였다.

하늘에서 수차 용들을 불렀으나 응답하지 않자 하늘은 땅이 울리도록 진노하였다.

empty

그제서야 용들이 알아듣고 용서를 빌었으나 하늘은 두 용의 정이 너무 지나쳐 하늘의 부름에 응하지 못하므로 두 용에게 따로 떨어져 다시는 만나지 말도록 명하였다.

두 용은 헤어지기가 몹시 아쉬웠지만 하늘의 뜻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진 후 제각기 자리를 정해 땅을 파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때가 되어 암용이 먼저 하늘의 부름에 따라 하늘로 올라갔고, 뒤이어 숫용이 올라갔다.

그때부터 이곳 사람들은 암용이 살다 올라간 곳(신도안면 용동리)을 암용추, 숫용이 살다 올라간 곳(신도안면 부남리)을 숫용추라 부르고 있다.

자료관리
담당부서 : 하부기관 > 신도안면 > 총무팀 > 조미영
연락처 : 042-840-3212
최종수정일 : 2017-06-05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