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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의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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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은 멀리서 보면 평범한 여느 산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계룡산 높은 봉이 충충히 푸르리니 맑은 기상 용솟음쳐 스스로 장백이요 산이 첩첩하여 용이 시리우고 봉우리 구름들이 만물을 기르네 내 전에 그 가운데 놀았거니 신령스런 그 기상 어디에 비길런가 문득 비 뿌려 세상을 살찌우도다 용이 구름 뿌리니 구름은 용을 쫓네

계룡산은 멀리서 보면 평범한 여느 산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운 골짜기와 바위와 나무를 둘러 보게 되면 그 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산봉우리가 줄지어 날카롭게 솟아 있고, 깍아지는 듯한 낭떠러지와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곳곳의 깊디깊은 골짜기와 그 골짜기에서 흐르는 쪽빛 내와 한데 어울려, 뛰어난 경치를 이루어 놓았다.

소롯길에 들어서면 온통 나무밖에 보이지 않으나 길이 꺾일 적마다 맑은 내와 만나고 산등성이에 오르면 잇대어 선 봉우리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계룡산의 최고봉은 845.1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의 모습이 수려하고 수석이 푸짐하여 이미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알려졌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의 5대 명산중의 하나인 서악(西岳 또는 中岳이라고도 하였음)으로 지칭되었다.

풍수가들은 이 산의 지리를 회룡고조(回龍顧祖 : 산의 지맥이 삥 돌아선 본 산과 맞서는 형국)의 형세, 혹은 산태극 수태극의 형세로 보아 매우 진기하게 여겼다. 이처럼 산세가 특이해서인지 계룡산에는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계룡산의 동·서·남·북에는 4대 사찰이 있었는데, 동쪽의 동학사와 서쪽의 갑사, 남쪽의 신원사는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북쪽의 구룡사는 현재 절터만 남아있어 그 흔적만을 엿볼 수 있다.

신도안 부근의 계곡에는 암용추와 숫용추가 있는데 계곡의 물이 흐르다가 고인 10평 남짓의 작은 못(沼)이 암용추이고, 서남쪽의 골짜기를 흐르던 옥같은 맑은 물이 스무자 정도되는 절벽의 폭포 밑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물이 괸 곳이 숫용추이다. 이 두 용추에는 옛날 신선한 두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이 두 곳의 수석은 그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룬다. 계룡산은 이처럼 산의 생김새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많은 계곡마다 소와 폭포를 안고 있고 산에 있는 수목의 54% 이상이 침엽수여서 늘 푸르른 인상을 준다.

이중환은「택리지」에서 이 나라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산으로 넷을 꼽았는데, 그것들이 곧 오대산과 삼각산, 구월산과 계룡산이었다.

그는 계룡산이 웅장함이나 수려함에서 다른 산에 좀 못할지 모르나 그 깊숙한 골짜기와 넓고 깊은 못은 다른 산에 없는 것들이라고 했으며 또 갑사와 동학사 같은 오래된 절과 기이한 명승지가 많다고 했다.

이 산에는 큰 골짜기가 일곱개가 있으며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그 언저리에 있는 광야의 젖줄이 된다. 이 물줄기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보면 첫째가 산의 남쪽인 신도안 지역으로 흘러 대전천과 유성천에 와닿는 갑천을 중심으로 한 내들이고, 둘째가 산의 북쪽 골짜기에서 흐르는 노천을 중심으로 한 내들이다. 이 내들은 논산시 상월면과 노성면을 지나 채운면에서 금강에 흘러들 듯이 충청남도의 들을 적시며 금강으로 흘러든다. 길짐승과 날짐승과 곤충이 350종류나 살고 있으며 개비자나무, 향나무, 전나무, 측백나무, 산목련, 가래나무, 굴피나무 같은 식물이 자그마치 6백종류가 더 되는 동·식물의 중요한 분포지역이다. 봄이나 여름에는 갖가지 꽃이 피고 가을이면 맛좋은 으름, 다래 그리고 보리똥 열매 같은 것이 많이 열린다. 이 뿐만 아니라 유서깊은 절과 전설이 담긴 유적들도 많다. 이를 테면 앞에서 동쪽의 동학사와 서북쪽의 갑사 말고도 서남쪽에 신원사가, 동남쪽에 쇠로 된 당간과 당간 지주와 같은 보물 넉 점과 신원사 오층석탑, 중악단, 영규대사 무덤 같은 것들이 있다. 또 의상대사 토굴, 영규대사 토굴, 조중봉 토굴, 나한 토굴 같은 토굴과 경관이 훌륭한 은선폭포, 용문폭포, 숫용추, 암용추 같은 폭포와 못이 널려있다. 이곳의 이런 경관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심신이 고달파 신의 힘에 기대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사람이 자연의 신비스러움에 외경심을 갖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런 곳에다 제단이나 신단을 갖추고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림으로써 사람은 그런 외경심을 표현하고자 그 자연의 신비한 힘으로 현세의 어려움이 풀리기를 바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라에서 이곳에 중악단을 세워 제사를 올린 것과 여느 사람과 푸닥거리를 하고 치성을 드리는 것과는 그 근본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1976년에 일어나 종교 정화운동으로 명승지에 있는 무허가 암자나 기도원 같은 것이 철거되기 전까지만 해도 경관이 신묘한 곳마다 교당과 암자와 수도원과 기도원이 수없이 들어섰고 골짜기마다 단골(충청남도에서는 무당이 단골이라 불린다)의 주문소리와 요령소리와 징소리가 울려퍼졌으며 못 근처나 큰 바위 둘레가 촛농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1968년 12월 31일 이후 정부는 61만km의 계룡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자연보호 및 관광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아무튼 이 산은 경관이 빼어나고 유적지가 많아 1968년 12월 31일에 경주 한려수도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곳곳에 능선이며 산봉우리들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서 등산하기에도 썩 좋다. 잘 알려진 등산길은 일곱여덟 가지가 있는데 흔히 교통이 편리하고 밥 집이나 여관이 많은 동학사 쪽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크게 네가지로 나누면, 첫째가 동학사에서 출발하여 다시 동학사로 들어오는 것이며, 둘째가 동학사에서 출발하여 갑사로 돌아오는 것이며, 셋째가 동학사에서 출발해서 신원사로 가는 것이며, 넷째가 동학사에서 출발해서 신도안으로 가는 것이다. 하기야 체력이나 시간에 따라 길게도 짧게도 잡을 수가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동학사에서 오뉘탑, 신흥암, 용문폭포를 거치거나, 은선폭포, 관음봉, 연천봉을 거쳐 갑사로 가는 방법으로 더러 상봉, 삼불봉, 천진보탑에 들르기도 한다.

능선을 타고 굽이를 볼 때마다 계룡산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고, 취향에 따라서는 절벽을 타내리며 갈 수가 있어서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시월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오나 어느 계절이고 그 계절의 독특한 정취를 맛볼 수 있다. 특히 겨울철의 눈덮인 계룡산은 좀 험상궂기는 하나 은선폭포의 물줄기가 얼면서 내려 된 얼음폭포 같은 아름답고 독특한 경치가 펼쳐지므로, 빈 산의 적막함을 두려워 말고 한번쯤 떨치고 가볼 만하다.

이곳에서 맑은 내를 끼고 5리쯤 오르다 보면 비구니들의 불교 전문 강원이기도 한 동학사의 들목에 홍살문이 보이고 그 오른켠에 청량사터의 오뉘탑과 계명정사로 빠지는 시멘트 계단이 있다 곧바로 잘 닦인 길을 따라 좀더 오르면 오른쪽에 동학사가 나타난다. 그 절뒤 언덕에 늙고 건장한 소나무가 서 있으며 절 앞으로는 우람한 느티나무 밑으로 내가 흐른다. 그리고 그 곁에 팔각정 하나가 서 있다. 숙모전을 빼놓고는 절안의 건물, 곧 삼은각과 동계사가 칠십년대에 시멘트를 많이 써서 새로 지은 것이라 둘레의 경치와 어울리지 않는다. 1981년 가을에 새로 법당을 지었고 숙모전의 지붕을 다시 해 이었다. 이 절은 대전과 거리가 가깝기는 해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데 신라 성덕왕때에 처음 지어졌고, 조선시대 영조 4년에 신천영의 난으로 불타 버렸다가 순조때에 다시 지어졌다. 지금의 숙모전은 고종때에 그 전의 것을 헐고 세운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홍살문이 있는 것은 숙모전, 삼은각 같은 것들이 왕조시대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세조때의 문신 기시습이 동학에 와서 사육신의 초혼제를 올린 일이 있는데, 그 뒤로 세조도 이곳에 몸소 와서 자신이 죽인 단종, 황보인, 김종서를 포함한 3백여 가까운 넋을 달래는 곳으로 초혼각을 짓게 했다.

그 초혼각이 불에 타서 다시 지어져 숙모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또 삼은각은 고려의 유신인 길재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정몽주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낸 곳으로 그 뒤에 이색과 길재의 위패도 함게 모셔져 삼은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학사의 들목에서 오른쪽으로 난 가파른 돌길로 5리쯤 가면 삼불봉 바로 밑에 계명정사가 있고, 그 곁의 예전 청량사터에 오뉘탑으로 불리는 5층과 7층의 석탑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 근처에 있는 토굴에서 도를 닦던 백제의 한 왕족이 어느 겨울 밤에 비녀가 목에 걸려 죽어가는 호랑이를 살려주자 호랑이가 그 보답으로 한 여자를 물어다 놓고 사라졌다. 그는 여자를 간호하여 살렸는데, 경상도 상주에 산다는 그 여자는 혼례를 치르고 신방에 들기 전에 호랑이에게 물려왔다고 했다. 왕족은 여자를 이튿날에 데려다 주려 했으나 밤새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혀 하는 수 없이 겨울을 함께 지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밤마다 끓어오르는 욕정을 좌선과 염불로 달래어 아무 일 없이 겨울을 넘겼다. 이듬해 봄에 약속대로 그 여자를 데려다 주었으나 그 여자는 곧 다시 되돌아와 불제자가 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의남매가 되어 부지런히 불도를 닦아 훌륭한 스님이 되어 입적했다. 뒤에 그 제자들이 그들의 불심을 기려 나란히 탑을 세웠으니 이를 오뉘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5층석탑은 백제 것으로 보이고, 7층석탑은 훨씬 뒤의 것으로 보여 이 전설과 탑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계룡산의 8경

그윽한 아홉 골짜기

이곳을 지나 능선에 오르면 왼쪽에 삼불봉이 손에 잡힐 듯이 솟아있고 오른쪽으로는 능선에 잇대어 장군봉이, 앞쪽으로는 신선봉과 고청봉 같은 여러 봉우리들이 발 아래에 펼쳐진다. 삼불봉의 꼭대기에서 관음봉과 연천봉을 거쳐 갑사로 갈 수도 있고 그 아래의 골짜기를 따라 금잔디 고개를 넘어 신흥암과 천진보탑과 용문폭포를 거쳐 갑사로 갈 수도 있다. 또 동학사에서 왼쪽으로 5리쯤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계룡산의 폭포 4개중에 가장 큰 은선폭포가 있다. 이 길로도 관음봉과 연천봉을 거쳐 갑사로 갈 수 있는데 이 폭포에는 옛날에 선녀가 내려와 멱을 감고 그 물을 길어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갑사가 있는 곳은 동학사 쪽보다는 못해도 공주에서 오는 교통도 편하고 길도 잘 닦여있다. 그리 넓지 않은 주차장에서 갑사로 올라가는 길이 시작되며 길 오른쪽으로 기념품 가게와 밥집 같은 것과 여관의 대문짝만한 간판이 조잡스러워, 듬성듬성 서 있는 키 큰 나무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느낌을 자아낸다.

갑사도 동학사에서처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갑사는 계룡산의 서북쪽인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절로,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창건했으며 그 뒤에 신라의 의상대사가 고쳐지었다. 이 절은 조선왕조 선조때에 정유재란으로 불타 버렸는데, 같은 때의 인호대사가 다시 세웠다. 이곳에는 대웅전, 강당, 대적전, 천불전같은 불당과 암자들이 열채쯤 들어서 있다. 그런데 본디 갑사는 지금의 대웅전 자리가 아니라 들목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로 가면 대적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네 보물 곧 부도, 쇠로 된 당간과 당간지주, 구리종,「월인보석」의 관목이 있고, 약사여래 돌입상, 보살 돌입상 같은 지방문화재와 우탑, 갑사, 사적비, 표충원, 신흥암 같은 유적들이 있다.

갑사는「추갑사」로 불릴만큼 가을 경치가 뛰어난데 반드시 가을이 아니어도 절 주변에는 골짜기와 바위를 타고 넘는 쪽빛 물이 이루는 경치가 뛰어나므로 언제라도 들를만하다. 특히 남쪽에는「갑사구곡」으로 불리는 용유소, 이일천, 백룡강, 달문택, 군자대, 명월담, 계명암, 용문폭포, 수정봉이 있다. 이 아홉 골짜기는 울창한 숲과 흘러내리는 내와 폭포가 있는 못과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서로 잘 어울린다.

용유소는 용이 노는 연못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군자대는 효종때의 학자 송시열이 어렸을 적에 이곳에 들어와 공부하다가 하도 계곡이 좋아 임금이 머물만한 계곡이라 하여 군자대로 이름하고 손수 바위에 새겨서 생긴 이름이다. 여름날에 달이 청명할 때에 달이 영롱하게 비친다는 명월담의 왼쪽 바위 아래에 약사여래 돌입상이 있고, 이곳의 왼쪽으로 앞의 동학사 이야기에서도 말했지만 용문 폭포를 거쳐 금잔디고개, 오뉘탑을 거쳐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다. 또 오른쪽으로 연천봉, 관음봉, 은선폭포를 거쳐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는데 연천봉을 오르는 길이 무척 가파르다.

용문폭포는 크기는 은선폭포보다 작으나 물이 깨끗하고 경관이 아름답다. 수정봉은 높이가 662m이며, 맑고 깨끗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앞에 있는 용문폭포, 군자대, 팔상전, 여래 사리탑, 나한 토굴, 대원아과 함께 「계룡팔경」의 하나인 천진보탑은 갑사에서 1.3km쯤 올라가면 나오는 신흥암에 있는데 법당에 부처를 모시지 않고 그 천진보탑에 예불을 드린다. 이 탑에 석가의 사리가 들어있다고 전해온다. 예전의 인도의 아쇼카 임금이 석가의 사리가 든 탑을 발견하고 그 조금씩을 마흔 여덟 방향에다 봉안케 하였다고 하는데 사천왕 중의 하나로서 북쪽을 맡은 비사문 천왕이 신통력으로 이곳에 넣었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경주 선산에 도리사를 짓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빛이 뻗어 나오는 곳을 보고 다가와서 예배를 드리고 갑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갑사의 대웅전에 있는 불상은 여느 절에 있는 것과 달리 손이 항마인의 형상, 곧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갑사의 보물들

대적전은 옛스러운 맛이 흠씬 풍기는 천장이 단청무늬가 뛰어나게 아름답다. 대적전 아래쪽의 쇠로 된 당간과 당간 지주는 보물 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이 당간은 충청북도 청주시의 용두사 터에 있는 것과 함께 쇠로 된 것으로는 이 나라에 둘 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것이다.

이 절의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절의 당간과 지주는 마치 국기 게양대를 고정시키는 구멍 뚫린 말뚝 두 개가 지주이다. 대개 당간은 없어지고 지주만이 남아있다. 당간은 큰 절의 표적이 되었던 것으로 그 꼭대기의 장식에 '청제', '백제', '적제', '흑제', '황제'라는 네 방향과 중앙을 맡아 본다는 다섯 신을 저마다 상징하는 오색 깃발을 꽂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월 초파일에는 이곳에 달린 도르래에 괘불을 걸어 괘불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대적전 아래의 쇠 당간은 모두 스물여덟마디로 이어져 있었는데 네 마디는 고종 30년인 1893년에 태풍에 부러지고 지금은 스물네 마디만이 남아있다. 또 대적전의 앞뜰에는 보물 257호로 지정된 정교하고 아름다운 부도가 보기 흉한 철책에 둘러싸여 있다. 이 부도는 청색이 도는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팔각형의 세겹 받침대에는 사자와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팔각형의 몸통에는 한면 걸러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높이에 견주어 폭이 좁아 안정감을 좀 잃은 듯한 지붕은 비탈이 급하기와 지붕모양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는 고려시대 불교미술품 중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본디 이 부도는 갑사에서 5리쯤 떨어진 골짜기에 있던 하사자암에 있었으며 1917년까지는 대체로 말짱했었으나 그 뒤로 파괴되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되살려 세운 것이다. 그 골짜기에는 본디 상사자암과 중사자암도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대웅전과 대적전 사이의 개울곁에 서 있는 소의 공을 기리려고 세웠다는 우탑도 본디는 하사자암에 있었던 것이다.

이 우탑에도 전설이 어려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비구니들만 있던 세 사자암에서 소 한마리를 길러서 짐을 실어 나르게 하고 심부름도 시켰는데 그 소가 영리하여 종이에 글을 적어 보여 주면 적혀진 대로 했다고 한다. 그 소가 늙어 죽자 비구니들이 그 공을 기려 탑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이것말고도 다른 전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정유재란으로 갑사가 모두 타버려 주지가 다시 세우려고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는데 꿈에 누런 소 한 마리가 법당 쪽으로 와서 사람처럼 입을 열어 "제가 절을 지어 드리겠습니다."고 말해 주지가 깜짝 놀라 깨어 보니 정말로 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소가 어디론가 가서 절을 세울 물자를 한 바리씩 실어와 마침내 절이 다 지어졌으나 너무 지쳐 죽고 말아 주지가 소의 공덕을 기려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절에는 보물 478호인 구리종이 있는데 조선시대 선조때에 만든 것으로 종의 꼭대기에 용이 두 마리 조각되어 있고 몸통은 꽃무늬와 법어 같은 것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것에 들며 높이가 132cm쯤 된다. 이 종은 식민지시대에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 물자가 딸리자 녹여쓰려고 빼앗아 갔으나 운이 좋게도 인천에서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에 전쟁이 끝나 아슬아슬하게 그 목숨을 건졌다.

아무튼 이 절에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들 말고도 보물 58호인 「월인보석」의 관목이 있고, 하사자암과 중사자암 자리에 있던 약사 여래 돌입상은 고려시대 말기의 것으로 많이 닳아 있으나 그 만든 솜씨가 우수하다. 그리고 보살 돌입상은 백제시대의 불상인데 유람객이 목을 분질러 지금은 갑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불법을 찬양하고 계룡산의 경치를 묘사한 글이 쓰여 있는 갑사 사적비와 영규대사, 사명대사, 서산대사의 위패를 모신 표충원 같은 여러 유적들이 있다. 또 갑사들목에는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해마다 정월 초사흘날 밤에 갑사의 승려들과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당산제를 지낸다.

전설에 따르면 3백년 전에 갑사에서 밤마다 장명등을 켜 밝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자꾸 기름이 없어졌다. 그래서 한 중이 지키고 있다가 삼경에 기름을 훔치는 덩치 큰 사내를 잡고 사연을 물었더니 그 사내는 자신이 당산나무를 지키는 신인데 사람들이 그 나무 아래와서 놀며 상처를 내고 더럽히므로 그것을 치료하고 닦으려고 기름을 훔쳐간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랫마을의 한 여자에게 역병이 들게 하여 그 여자가 시주로 밭을 바치면 낫게 해 주겠으니 뒤에 그 밭에서 나오는 수확으로 제를 지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내의 말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그 때부터 승려들과 마을 사람이 이 나무에 제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름답고 조용한 신원사 언저리

공주나 논산에서 신원사로 오는 버스 있다. 이 마을을 찾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화강암으로 된 골짜기의 물이 맑고 마을 바로 뒤로 펼쳐진 산의 경치가 아름답다. 신원사는 갑사와 동학사와는 좀 달리 오밀조밀한 맛이 없으나, 터가 널찍하고 절둘레의 밭도 넓다. 사람들은 이곳으로 곧바로 오기보다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동학사나 갑사들 들러서 오는 수가 많다. 곧 동학사에서 관음봉이나 상봉의 골짜기를 타고 산등성이를 타고 온다. 그런데 연천봉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오는 길은 내리막길로 십리쯤 되나 양쪽으로 아름답게 펼쳐진 산과 그 사이의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와 지루하지가 않다.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있는 이 신원사는 옛 모습을 대체로 많이 지니고 있다. 본래 백제 의자왕 때의 중 보덕화상이 창건하였고 그 안에 있는 영원전은 무학대사가 세웠으나, 지금의 건물은 그 때 지은 것이 아니고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뒤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절의 둘레에는 고왕암, 등운암, 남암, 마명암 같은 암자가 있다. 그리고 절 곁에, 글머리에서 말한 지방문화재인 중악단과 그 앞터에 오층석탑이 있다.

이 절에 대해서는 전해 오는 이야기가 많다. 이 절에서 동쪽으로 오리쯤 떨어진 고왕암은 나·당 연합군에게 쫓긴 백제왕자 융이 숨어 있다가 신라에 항복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왕암 가까이에 있는 마명암은 왕자 융의 말이 그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그 암자에 와서 슬피 울다가 죽었다고 해서「말 울음」이란 뜻의 「마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암자는 흔적만 남아 있는데 여기서 신원사로 내려오는 돌길은 꽤 호젓하고 아름답다. 또 신원사를 지을 적에 만든 여래 사리탑은 오층석탑으로 한층이 없어져 지금은 사층만 남아 있는데 맨 위층의 몸통과 지붕이 돌 한개로 다듬어진 잘 생긴 탑이다. 그런데 이 신원사는 이성계가 그가 꾼 꿈을 임금이 될 꿈이라고 풀이해준「팥거리할머리」를 천기가 누설될까봐 죽였는데 임금이 된 뒤에 이 할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고 해서 옛 이름이 신혼사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 할미는 계룡산의 산신이 되어 매바위라고도 불리는 상봉에 살면서 계룡산을 다스린다고도 한다.

「정감록」의 그 신도안

신도안에서 보면 상봉이 선뜻 이마에 닿을 듯 솟아 있다.

그리고 상봉을 중심으로 해서 왼쪽으로 국사봉과 그 뒤로 연천봉이, 오른쪽을 장군봉과 삼불봉이 보인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즉 동학사로 가는 길쪽으로 오리쯤 가면 용화사 암용추가, 왼쪽으로, 곧 신원사나 관음봉쪽으로 가는 길로 오리쯤 가면 숫용추가 자리잡고 있다.

신도안은「정감록」이나 풍수도참설에서 '난을 피하기 가장 좋은 열곳' 중에 한 곳으로 꼽았다 하여 천재의 재난을 피하려고 사람들이 나라안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이곳은 대전과 논산에서 시내버스가 들어와 교통이 편한 축인데 계룡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도랑이 넘치게 흐르고 마을 뒤로 덩지가 큰 계룡산의 여러 봉우리가 한데 솟아 있어 안쪽으로 넉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개울을 따라 계룡산 안쪽으로 올라가면 그 골짜기의 아름다움이나 굽이마다 펼쳐지는 풍경에 절로 감탄이 나올만 하다. 이런 여러 조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갖가지 신흥종교가 들었다.

토속신앙과 무속은 말할 것도 없고 동학사상도 뒤섞고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를 제 나름대로 짜맞추었다고 가히 알려진, 이름마저 특이한 종교단체들이「세계종교 연합법황청」,「통일제단」,「신령 도덕회」,「간디 연구소」,「세계 일가공회」,「떡보살」,「무량 천도」같은 간판을 내걸고 있다. 이것들은 어찌보면 학술단체 같고 또 어찌보면 절이니 교회 같은데, 신도안을 중심으로 하여 계룡산의 산봉우리와 골짜기 구석구석에 예배소, 암자 또는 기도원을 차려 놓고 있다. 대체로 불교계통의 집단이 80군데쯤이고 유교와 선도와 기독교 계통의 집단이 각각10군데쯤이다. 그런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불교계통이 줄고 증산교와 찬물교 계통의 유사종교가 늘고 있다. 1976년에 이른바 종교정화운동이 벌어지기전까지 자그마치 2백군데 훨씬 넘었던 이런 유사종교 집단은 정화운동으로 많이 강제로 헐리고 쫓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계룡산의 신령한 기운을 못잊어 신도안 민가로 숨어들어 그대로 버티고 있다. 산꼴짜기마다 펄럭이던 울긋불긋한 장식이나 깃발도, 돼지머리와 고사떡을 머리에 인 아낙네들의 행렬도 사라진 것 같지만, 이들은 차마 예전처럼 드러내 놓고 벌이지는 못해도 아직도 숨어서 국립공원 관리인의 단속의 눈길을 피해, 계속해서 푸닥거리를 하고 있다.

신도안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이곳을 수도로 삼으려고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곳은「정씨의 도읍터」라는 도참설 때문에 왕궁을 짓는 공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서울로 옮겨갔다고 하고, 뱃길과 다른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으로 적당치 않다는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고도 한다. 아뭏든 그 때에 왕궁을 세울 공사를 벌였음을 입증하는 왕궁 초석 105개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용이 승천했다는 암용추와 숫용추

이곳에서 동학사 쪽으로 10리를 채 못가면 용화사가 나온다. 이 절은 동학사, 갑사, 신원사와 더불어 계룡산의 네 절이 든다. 통일신라시대에 관음사로 창건된 이 절은 고려시대에 불에 타 없어지고 나서 1920년 무렵에 다시 지었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 불에 타 없어지고 나서 1920년 무렵에 다시 지었다. 이 절은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곳으로 가을이면 감 가지가 휘어지게 감이 열리고 그것을 따는 비구니들의 해맑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경내에 석조 미륵불과 오층탑이 있다. 구 용화사지에서 서쪽 골짜기를 타고 오르면 암용추가 있는데 그 이름은 신원사 쪽으로 5리를 가면 있는 웅덩이인 숫용추와 짝지워 붙여진 것이다. 숫용추는 암용추에 견주어 물이 더 깊고 아래와 위에 웅덩이가 두 개 있는데 그 생김새가 남자의 성기를 닮았고, 암용추는 그 생김새가 여자의 성기를 닮았다. 이 두 곳이 영험이 있는 푸닥거리 장소로 여겨져 온 것은 성기 숭배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또 용추라는 이름이 드러내 주듯이 이 두 곳에서는 용이 도를 닦아 승천했다고 한다. 이 두 용추는 위에서 떨어져 시원스레 부서지는 물 소리와 바위벽과 숲이 어울려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푸닥거리가 끊이지 않았던 이 두 웅덩이 양쪽 바위벽에는 이곳에 갖가지 소원을 빌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요즈음은 암용추가 있는 계곡 아래쪽에 작산 저수지가 생겼으며 620 사업 이후로 외부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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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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