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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자연과 어우러지는 문화·국방모범도시 충청남도 계룡

계룡의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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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의 산태극 수태극도 - 계룡산은 신도안을 중심으로 산과 물이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것처럼 태극의 모양을 이루어 예로부터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대 길지로 여겨졌다.

풍수·도참설에 의한 국도예언지

계룡산 신도안은 계룡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산록에 있는 논산시 두마면 중의 5개 리 및 공주시 계룡면의 일부분을 포함한 면적 약 10리, 동, 서, 남, 북 4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면 경사가 광활한 땅이다. 도참설과 풍수설에 따르면 이 땅이 장차 왕도가 된다는 것이다.

도참설(圖讖說)

도참(圖讖)이란 불확실한 미래의 길흉화복을 알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의 신봉, 조작 내지 유행은 동아시아 일부에서 보이지만 특히 중국·한국에 있어 일층 많이 발견되는 사상이며, 더욱 그 정치·사회사의 이면에 있어 때때로 밀접한 교섭을 가지던 것이다.도참은 도(圖)와 참(讖)을 합친 개념이지만,「도(圖)」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상징·표징·신호·징후·전조·암시를 뜻한다.

일정한 문자나 기호 또는 구체적 대상물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어떤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참(讖)」은 참언(讖言)·참기(讖記)·참위(讖緯) 등의 용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은어와 밀어의 상징적 언어로 역시 장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이다. 도참은 흔히 풍수지리와 결합하여 그것을 소재로 함이 많았다. 물론 거기에는 천문·역운·사상·도교사상, 기타 고유신앙과 관계가 밀접하였지만 무엇보다도 풍수지리와 관련성이 더 깊었다. 종래 이런 유의 사상은 종종 신비적 언설(言說)에 의하여 인심을 자극 혹은 지배하고 실제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 바가 적지 않다. 한 왕조가 일어나고 망하는 소위 역성혁명의 큰 변동기에 있어서는 물론이요, 기타 내환외우로 시국이 불안할 때에도 이런 종류의 사상은 반드시 머리를 들고 활보한다. 그리하여 정치운동, 민중운동, 지도자 자신이 이를 이용 혹은 조작하여 자기편에 유리하도록 민중을 기만하고 구사하여, 민중은 이에 맹신, 맹종하여 많은 성패득실의 자취를 역사상에 남겨 놓았다 (이병도,「고려시대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1986).

도참은「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은 전한 말에서 후한 초이다. 도참사상의 전래는 삼국시대 이전은 알 수 없으나「당서(唐書)」고려전에「고려비가」가 알려진 것이 삼국시대 말이니 이때에는 중국류의 도참식 비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의자왕 20년(660)에 "백제는 보름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百濟同月 輪新羅如新月)"라는 가사가 있었다. 즉 백제는 달이 차서 장차 기울 것이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아 번성하여 나갈 것이라는 예견이었는데, 그뒤 왕조의 흥망을 예언하는 도참의 효시가 되었다. 이러한 도참사상은 왕조의 흥망·성쇠의 변동이 있는 불안한 때에는 더욱 성행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토착신앙과 도참사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사원건립의 남발을 막고, 서경을 북방개척의 요충지로 삼으라고 하였다. 태조의 훈요십조 중 제8조는 풍수지리에 입각한 도참이었다. 즉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바깥 쪽은 지세와 산형은 모두 거꾸로 뻗었으니 이곳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면 정사를 어지럽히거나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터이니 등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당시 이런 지리상의 전통적 신념이 인심을 지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고려조에 있어서는 계룡산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도참지리설은 고려조에서 거의 대대를 통하여 끊이지 아니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참류는 잇따른 사화·임진·병자 양난으로 국내외의 정세가 흉흉해지자 성행을 하였다. 조선의 건국을 전후해서는 십팔자위왕설(十八字爲王說)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었다.

태조 원년 7월에.

"임금이 잠귀에 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금척을 주면서 말하기를, '시중 경복흥은 청렴하기는 하난 이미 늙었으며, 도통 최영은 강작하기는 하나 조금 고지식하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을 사람은 공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문밖에 이르러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지리산 바위 속에서 얻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글에는 '목자(木子:李)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하고, 또 비의(非依)·주초(走肖)·삼전삼읍(三奠三邑)등의 말이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이해 들어오게 하니 이미 가버렸으므로, 이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고려의 서운관에 간직한 비기(秘記)에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설이 있고, 또 왕씨가 멸망하고 이씨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는데 고려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숨겨지고 발표되지 않았더니, 이 때에 이르러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또 조선이라 한 뒤에야 곧 조선을 이른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의주에 큰 나무가 있는데 말라 썩은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개국하기 1년전에 가지가 나고 무성하니, 그 때 사람들이 개국의 징조라고 말하였다."(「태조실록」권 1 원년 7월 병신조)

라고 하여 조선의 개국을 예언하고 있다. 또 서운관에 간직한 비기에 하나인「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에 조선의 건국을 예언하는 내용이 있다. 즉 우리 동방에는 왕조 변혁이 9번 있다는데 그중에 건목득자(建木得子) 혹은 십팔자(十八子)의 성(李字의 )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도참설은 고려말 사회의 혼란기에 크게 성행하였다. 태조는 즉위하자 마자 "송도는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망국의 터"라는 참설에 사로잡혀 천도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중의 후보지 하나가 계룡산이다. 태종 17년(1417)에는 도참설의 유포와 소장을 금지하는 영을 내리고 다시 서운관에 보관되어 있던 음양·도참 관계서적 중 가장 황망한 것을 골라 소각시켰다. 이렇듯 태종 때에는 도참서가 된서리를 맞았다. 그후 조선 중기에도 다시 도참이 성행하였는데 사회 때에는 도참이 한몫을 한 사실을 도참의 사유구조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종 때 도참의 사유구조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종 때 도참으로 화를 당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의 "주초위왕(走肖爲王)설"이다.

연천봉 바위 참구- 조선은 개국 4백 82년 후에 망한다는 뜻으로 조선의 운명을 예언한 글이다.

즉 일국의 인심이 조광조에 돌아간다는 유언비어가 궐내에 퍼지고, 대궐동산에 주초위왕(走肖:의 파자로 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중종의 손에 들어갔는데 이 도참으로 조광조는 사사되고 말았다.

또 당쟁의 와중에서 밀려난 정여립은 전해 내려오는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奠邑興: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의 참설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믿어 이 참문을 옥판에 새겨 지리산 석굴에 감추었다가 꺼내서 민심을 회유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년). 이러한 도참류는 임진·병자 양난을 거치면서 널리 유포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정감록」이라는 비기·도참서가 널리 퍼졌다. 위와 같이 도참설은 다분히 정치적인 음모와 결부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왕조의 변혁기와 혼란기에는 기존 집권층의 체제유지를 위하여 봉사하거나 반체제적인 세력이 민심을 회유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여 직간접적으로 역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감록의 계룡산 국도 예언

정감록은 참위설류의 민간비결서 중의 하나이다. 정감록이란 이름아래 일괄 수록 되어 있는 비결은 여러 이본을 통털어 50여종이나 된다. 대표적인 몇가지의 예를 보면 감결·징비록·정이문답·유산록·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삼한삼림비기·무학비전·오백론사·도선비결·북두류노정기·두사초비결·정가장결·피장처·청구비결 등등이 있다. 이들의 거의가 지리쇠운설(地理衰運說)에 기초해서 한국의 역대 왕조의 운수를 추점(推占)·예언(豫言)을 하고 있는데, 주로 이씨망(李氏亡) 정씨흥(鄭氏興)을 근본비결로 감결(鑑訣)을 머리로 하고 있다.

정감록

정감록 중 감결도 이씨조선의 조상인 이심(李心)과 그 대흥자(代興者)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이 8도 산맥의 운이(運移) 현상을 답사하면서 풍수적으로 토론한 것이다. 즉 두사람의 대화형태로 서술되고 항상 이심이 질문자가 되고, 정감은 해답자로 되었으며 왕조나 국운의 흥망성쇠를 점치고 있다. 정감록의 저작자 연대에 대해서는 조선초에 정도전이 지었다는 설과 조선 중엽에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가 지었다는 등 그 설이 구구하나 대개 임진·병자 양란 이후 민심이 흉흉해진 전란혼란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신일철 외,「한국의 민족종교사상」, 「정감록」편, 삼성출판사, 1990).

이와 관련하여 육당 최남선의 정감록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력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정감「정감록」과의 내력이 어떠하냐 하건대 정감과 이심이라는 이는 다 실제 인물이라 할 근거가 없으며, 또 조선 고대의 예언서는 역대실록 같은데 그 명목을 수록하는것이 수십종으로서「정감록」이란 것은 그 가운데 보이지 않으니까「정감록」이 생긴지는 그리 오래인것 같지 아니합니다. 다만 이씨조선이 정씨의 혁명을 만난다는 운명설을 선조조 이전부터 행하여 선조 을축의 정여립이 역모한 것이 실로 이를 배경으로 하였으며, 그뒤 광해군 인조 이하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정씨의 계룡산의 그림자가 반드시 어른거려서 거의 예외가 없었고, 특히 정조 9년 을사 홍복영의 옥사에는「정감록」이라는 명칭이 분명히 나오니, 대개 정감록이라는 것은 선조로부터 정조때에 이르는 어느 시기에 혁명운동상 필요로서 자료를 민간신앙 방면에서 취하여 미래 국토의 희망적 표상을 만들어내야 합니다"(최남서, 「조선상식문답」 제7신앙편).

「감결」에 보이는 계룡산 관련 문구

「감결」을 가리켜 흔히 「정감록」의 원본이라고 말한다. 이 감결에서 많은 이서(異書)들이 파생되었다고 하며, 모든 「정감록」이서들이 감결의 내용을 인용했거나 수정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감결」은 감(鑑)이라는 사람이 썼다는 말로, 감은 중국 고대의 사마휘나 제갈량보다 여러모로 뒤지지 않는 예언가라고 서두에서 밝혀 「정감록」의 권위를 지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계룡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심히 말하기를 '금강산으로 옮겨진 내맥의 운이 태백산·소백산에 이르러 산천의 기운이 뭉쳐져 계룡산으로 들어가니, 정씨가 80년 도읍할 땅이로다. 그후 원맥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니, 조씨가 천년 도읍할 땅이며, 전주는 범씨가 600년 도읍할 땅이요, 송악으로 말하면 왕씨가 다시 일어나는 땅인데 그 이하는 상세하지 않아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생략...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청포의 대가 희어지고, 초포에 조수가 생기어 배가 다니니 ...생략... 대중화 소중화가 망할 것이다."

또 심(沁)이 말하기를 "계룡산에 나라를 세우면 변씨 성을 가진 정승과 배씨 성을 가진 장수가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방성(房姓)과 우가(牛歌)가 손발같이 일하게 되리라." 고 하였다.

이와같이 「감결」이 한양 이씨(漢陽李氏)의 멸망과 계룡 정씨(鷄龍鄭氏)의 흥기를 예언하고 있다. 즉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초포에 배가 들면 이씨 조선이 망하고 계룡산에 정씨의 도읍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계룡산의 신도안은 초기부터 새 도읍지의 후보지로서 복정(卜定)된 바 있었다는 것이 이 「감결」내용과 깊게 관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감결」에는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30리의 평평한 모래밭에 남문이 다시 일어난다고"고 하며 계룡산에 정씨의 새 도읍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다. 아울러 십승지지(十勝之地)의 땅을 거론하고 있는데 여기에 계룡산이 포함되어 있다. 즉 "계룡산 밖이네 고을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존할 만한 곳이다(鷄龍之南外四郡)"라 하고, 피난처로서 "공주 계룡산으로 유규 마곡의 두 골의 물 길이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公州鷄龍山 維鳩麻谷의水之間 피난二百里)"라고 하여, 피난처 가운데 여섯번째로 꼽고 있다. 사실 이 「감결」은 조선이 한양에 도읍하여 5백년의 역사가 끝나고 말세에 새 지도자가 나타날 징조와 인물을 제시하고 있고, 그 주인공이 정씨로서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삼한산림비기」에 보이는 계룡산 관련 문구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는 「정감록」 비기 중에서 문장이 가장 길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가장 다양하기 때문에 혹자들이 이것이야말로 정감록의 진본이라 하기도 하며, 도선 국사의 기록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는 「감결」이 주로 조선이 망한 뒤 정씨의 시대에 대하여 예견하는데 반해 「삼한산림비기」는 고려의 창업을 예언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도 도선국사와 비슷한데서 연유된 듯하다. 「삼한산림비기」에 보이는 계룡산 관련 문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계룡산 아래 도읍할 땅이 있으니 정씨가 나라를 세우리라. 그러나 이씨에게는 미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밝은 임금과 의로운 임금이 연달아 나고, 세상이 운회하는 때를 당해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어진 재상·슬기로운 장수·불사·문인 등이 왕국에 많이 나서 일대의 예악을 찬란하게 장식하리니 드물게 보는 일일 것이다. 한 나라의 도읍으로 금강이 제일이고, 그 다음이 송악, 그 다음이 한산이다. 서경(평양), 동경(경주)은 바다에 가깝고, 북경(원주), 원앙은 땅이 몹시 좁으며, 마니산은 비록 바다 가운데 있지만 반드시 왕이 거하리라. 그러나 10년이 못되어 도읍을 옮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룡산 아래 땅이란 신도안을 말하며, 금강을 제일의 도읍지로 꼽고 있는데 이것도 계룡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을 뜻한다. 또 "삼국이 나누어 서는 일은 틀림없이 묘년(卯年)과 진년(辰年) 사이에 생길 것이다. 태백산 아래 자리잡은 나라가 제일 강성하여 170년 후에 끝내 두 나라를 병합하나 결국에는 정씨인 외성(外姓)에게 빼앗길 것이다.

이 때의 인사들은 반드시 계룡산 아래에서 묻으라. 대궐터에 여섯자 되는 돌로 만든 당간지주(휘장)가 땅속에 묻혀 있고, 그 위에 42자나 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마땅히 금성(金姓)·목성(木姓)의 성을 가진 이가 서를 만날지라도 놀라서 죽이거나 해하지 말고 그곳에다 정전(正殿)을 세우면 천하가 평안하고 나라 안이 늘 태평할 것이니 즐거운 일이다."

여기서 금사는 신사년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오행의 간지를 수목화토금(水木火土金)으로 표현하고 짐승의 이름을 대입시켜 연대를 암시한 것이다. 돌로 만든 당간이 여섯자나 되는데 그 돌에 42자가 새겨진 돌이 구기자나무 숲에서 발견될 것이니 그 자리에 궁궐을 지으면 태평할 것이라고 하였다. 즉 당간지주에 새겨진 돌을 찾아 그 자리에 정전을 짓는 자가 바로 자도자가 되어 어지러운 말세를 다스린다는 새 시대의 도래를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정전의 자리란 계룡산 신도안을 가리키는 것이다.

「도선비결」에 보이는 계룡산 관련 문구

이 「도선비결」은 도선이 남긴 비결 중에서 조선의 역사와 조선말에 나타날 징조와 마침내 등잘할 정도령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으로 누군가가 이 분야만을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계룡산 관련 내용이다.

"인묘년을 당하여 남북이 서로 솟은 발처럼 형세를 이룰 것이다. 오얏나무를 부추겨 주고 베고나야 비로소 나라의 기틀이 정해진다. 한 나라의 편안해지니 누구의 공로인가? 오직 정도령이 총명하고 신기하며 예지롭기 때문이다. 군사를 서쪽 변방에서 일으키니 천자가 기쁘게 여긴다. 세 이웃이 서로 도와 계룡산에 세 아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도읍을 정할 것이다."

위 내용 중 삼자전안(三子奠安)은 정(鄭)자를 풀어 놓은 글자로서, 정도령이 출현하여 서쪽 변방에서 일을 도모하기 시작하니 천자가 이를 기뻐하며 세 이웃이 서로 도와 계룡산에 도읍할 세 아들을 편안케 한다는 뜻이다. 그때야 비로소 이씨 조선의 잔영이 완전히 소멸된다고 말한 것이다.

격암유록에 보이는 계룡가

이 「격암유록(格菴遺錄)」은 한말이나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미래를 지향하는 지사들에 의해 이름을 가탁(假託)하여 기록 전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격암유록에 수록된 내용은 대부분 정감록의 문구를 인용 혹은 가감 가필함으로써 전래되어 오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다음의 두 편의 계룡론은 여기에 실려 있는 내용을 실은 것이다.

계룡론 - 1

"천하렬방회운 근화조선계룡지 천종지성 합덕궁 배궁지간 양배건혈유도중 사해통 무후에지하래정 정본천상운중왕 재래금일정씨와 불지하성정도령 계룡석백정운왕 정조천년 정감설 세부지이신인지 호사다마불면옥 불인출세백조일손 종인지출삼년간 불사영생출어십승 불입사우차운출현사면여시 십승백조십손호운의 남래정씨 수가지 궁을 합덕진인래 남도사룡금안재 수종백구주청림 일계 사각방무수 정조지변일인정의 무부지자정도령 천지합운출시목 궁을량 백십승출 십팔성인정진인 천지진동화조석 강산열탕 귀부지 계룡백석정도령우천마백시사지미재 차운신명계 장안재도정도력 투편사해멸마전 사해태평락락재"

계룡론 - 2

"계룡속리지간에는 촌촌왕기전햇으며 지리덕유지간에는 곡곡길운아니던가 지리청명혜예자로 덕유지인사람사람 방방곡곡길운으로 사중구생되어나리 일명선운손지으로 손계진룡쌍목운에 이기화합하고보니 청림도사계룡정씨 이섭대천목도내행 천운선도장남녀라 물사세속리탈하고 불고좌우전진하자 속리자생계룡입에 선관선녀작배처로 계룡백석무기고로 전말궁자전겸이라 팽사삼리복지로서 비신비수전했으며 인미피병지방이라 삼재불입선경고로 입임란어박이라고 십승지인전했으니 무릉도원종도처가 정토복지아니던가 선도창운시래고로 계룡정씨전했다네 인간자미행락으로 세탈속리불입사 이기령산십승운에 지리제산합당할고 지리덕유비길지라 지자기입전해었고 계룡속리비길지라 절기공주계룡일세 이씨장말이기령리 이입계룡하자인고 청학포란입우계룡 기유세상지리호아"

백석가

계산백석흑서호아년하시계석호냐 흑석호의하의 하며 흑백석을하시망고 흑세무민백석야니 백석은 노석야요 노석장인기석우석야(정다운 「정감록」, 미알, 1986) (계룡산지 1994 충청남도 554~558쪽)

계룡산의 국도 시기

이상에서 정감록에 보이는 계룡산의 정씨 800년 도읍설, 난리 피난지설 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면 계룡산의 신도 건립시기는 언젠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정감록의 '계룡백석 청포죽백 초포조생행주(鷄龍白石 淸浦竹白 草浦潮生行舟)'의 기록과 연천봉 바위에 새겨진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이라는 참구에서 그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계룡백석 청포죽백 초포조생행주'의 참설

계룡산의 신도시기와 관련하여 '鷄龍白石 淸浦竹白 草浦潮生行舟 世事可知'라 하였다. 이 말은 '계룡산의 바윗돌이 희어지고 청포에 있는 대나무가 희어지고, 초포에 물길이 나아 배가 다니게 되면 세상 일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정도령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미 계룡산의 바위는 흰색이 된 지 오래지만 초포의 물길이 나지 않아 배가 뜨지 못하여 아직 계룡산에 신도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새 도읍지가 될려면 금강물이 초포 앞으로 돌아들어서 배가 다녀야 되는데, 그렇게 될려면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에 있는 「무너미고개」가 터져서 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인조실록」 6년 정월조에 '초포에 조수가 들어오면 계룡산에 도읍을 세우리라'는 기록은 「정감록」 내용과 비슷하다. 그럼 '초포행주'의 지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초포는 논산시 항월리에 위치해 있는데 풋개라고 한다. 이는 풀초(草)에 개포(浦)자를 써서 초포라 한다. 현재는 금강물이 대전 회덕을 지나 부강을 거쳐 공주-부여를 돌아 강경으로 하여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그런데 '초포행주'란 회덕-부강을 따라 내려온 금강물이 공주 못미쳐 용왕동에서 서쪽으로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무너미고개'를 넘어 논산시 광석면 항월리 초포로 들어 두마면 천마산 자락에 위치한 양정고개로부터 내려온 연산천 물과 합쳐져 공주-부여로 돌이 않고 곧바로 공주-연산-논산을 거쳐 강경을 지나 서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금강경쪽으로 빠지게 되어야만 계룡산의 '수태극(水太極)' 형상이 더욱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풍수에서 말하는 계룡산의 '산태극 수태극(山太極 水太極)'의 현상이 완전무결해짐으로써 '산수회포(山水回抱)' 또는 '산래수회(山來水回)', 즉 산수가 모이고 바람이 흐트러지지 않게 되어 신도안이 풍수상으로 지세가 더욱 좋아져서 신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룡산에 들어와 정도령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무너미고개가 무슨 조화로든지 무너지기만 하면 공주서 부여를 지나 강경으로 반월형을 그리면 흘러 내리던 백마강이 바로 공주서 이 고개를 넘어서 초포로 휘돌려서 갈 것이라고 믿고, 여러 백년동안 눈이 뚫어지게 '무너미고개가 터져 금강물이 초포로 들기를 기다렸으나 아직도 그놈의 고개는 꼼짝도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무너미고개'란 물이 넘친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또 배가 넘어 다닌다고 하여 '배너미고개'라고도 하고, 또 배가 넘는다고 하여 '배넘어고개' 혹은 널 「棺」처럼 고개 밑이 비었다고 하여 '널티재'라고도 한다. 이와같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무너미고개는 물길과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너미고개는 공주 용왕동에서 연산간 23번 국도를 따라 약 5km정도 가면 얕트막한 고개에 다다른다. 이곳은 물길이 한쪽은 공주쪽인 동쪽으로 내려가고 또 한줄기는 서쪽인 연산-논산쪽으로 흐르는 분수령이다. 지금도 이곳은 물이 없는데도 지명이 사포리·사포·점방이(물이 흘러 발을 걷어올린 잠방이, 즉 반바지를 입고 다닌다고 하여 붙여짐)라고 하여 물과 관련된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다. 또 신도안이 도읍이 되기 위해서는 '선강후도(先江後都)' 즉 강이 먼저 뚫여야 도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무너미고개'가 터져 금강의 물줄기가 초포로 들어 이곳으로 배가 들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서울은 '선도후강(先都後江)'으로 도시가 먼저 생긴 후에 강이 돌아가서 도읍이 되었다 한다. 한 때 무너미고개가 뚫려 금강물이 물길을 바로 무너미고개로 돌려 논산-강경쪽으로 내면 새로운 물길로 들어가는 논밭이 수백마지기 정도에 불과하지만 비하여, 공주-부여에 이르는 금강의 물길이 막힘으로써 수백만평의 하천부지가 옥토로 변하여 많은 경제적인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시대 때 이목(二木)이란 일본사람이 수리조합을 하느라고 이 무너미고개를 뚫어 금강물을 이 고개로 돌리기 위해 주민들로부터 승낙서를 받아 말뚝까지 박았다 한다. 그러나 이 작업은 중도에 중지되었는데 만일 이때 물길이 뚫렸었더라면 그것이 바로 '초포행주'가 되어 도읍이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초포에 배가 뜬 것을 대신 1911년 호남선이 개통되어 기차통행이 마치 선박이 육상을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쇠배(기차)가 다니는 것이 바로 초포행주와 견주어 말하기도 한다.

'방백마각 구혹화생'의 참설

계룡산 연천봉 맨 꼭대기에 있는 바위에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데 언제 누가 새기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여덟자가 조선의 운명을 예언한 참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백마각(方百馬角)'을 풀이하면 「방(方)」은 네개의 방위를 나타내는 자로서 '사방즉사(四方卽四)'즉 넉사자를 뜻하며, 「백(白)」은 백(百)을 가리키므로 '방백(方白)'은 '사백(四百)'을 의미한다

「마(馬)」는 마소같이 쓰여 말이나 소는 같은 것으로 소우(牛)자를 풀면 팔(八)과 팔십이(八十二)란 말이 되니, '방백마각'은 사백팔십이(482)란 뜻이 된다. '구혹(口或)'이 나라국(國)자이고, '화생(禾生)'은 이(移)의 고자를 파자한 것(논어에서는 옮길이 「移」자를 벼화 「禾」변에 발생 「生」을 써서 사용하였다)으로 국이(國移)를 뜻한다. 따라서 '방백마각 구혹화생'은 482년에 나라를 옮긴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은 개국 482년 후에 망한다는 뜻으로 5백년을 못넘긴다는 참구이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의 존속기간은 519년으로 21년이 더 연장되었다. 이러한 참설과 관련하여 이씨 왕조는 왕조의 연장을 위하여 계룡산에 정씨 왕조가 들어서는 기운을 막기 위해 계룡산 연천봉 밑에 압정사(壓鄭寺)를 세웠다고도 한다(이용학, 「계룡산 신도안 도참사상고」, 논산군 향토연구회지 제3집, 1989). 즉 정압(鄭壓)이란 계룡산 정씨 800년의 왕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민비는 대신 여관리를 보내어 연천봉위의 영천(靈泉)에서 몸을 씻고 원생귀자(原生貴子)의 기원을 하였다. 그 영험이 있어서 이왕구(李王坵) 전하의 탄생을 보았기 때문에 매년 30석의 공양미를 하사했다고 했는데 그곳에 왕기가 있다고 믿고 그 왕기를 받아 왕자를 탄생시켜 국조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위와 같은 참설이 실증되어가고 다음과 같은 선조 때의 정여립의 모반사건, 광해조의 이의신의 계룡천도 상소 사건, 정조조 정후겸의 계룡옥사·홍복영의 정감록 사건 등은 어느 시기에 이르면 계룡산에 신도가 실현될 것이란 기대심리가 깔려 있음을 나타내는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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