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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의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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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고조 맥세도

옛부터 계룡산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명산이다. 당(唐)의 장초금(張楚金)의 한원괄지부(翰苑括地志部) 백제조에 계산동치(鷄山東峙)라고 한 기록과 아울러 동서 옹씨(擁氏) 주소인괄지지(註所引括地誌)에 國東有鷄藍山云云)이라 한 것은 당시 백제 국도인 부여 동쪽의 명산인 걔룡산을 칭한 것으로 이 산의 이름이 이미 당나라 시대 중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백제나라 동쪽에 계룡산이 있는데 일년내내 사계절이 고르고 중국과 같은 문화를 가진곳 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계룡산이 토함산(동악), 태백산(북악), 지리산(남악), 팔공산(중악)과 함께 신라 오악중의 하나인 서악으로서 해마다 제사를 올려왔던 곳이었고, 고려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십요훈요(十要訓要)중에 차현이남 공주강외 외형지세 병추배역 인심적연 ..... 수기량민 불선 사재위용사(車峴以南 公州江外 外形地勢 竝趨背逆 人心赤然 ..... 雖基良民 不宣 使在位用事)라 하여 공주 금강 이남의 산맥이 거슬음은 고려에게 훗날 그 지방 인사의 반역을 경계함과 동시에 계룡산은 배역면좌(背逆面坐)하였다고 경시하면서도 그 내룡(來龍)인 천호산에 개태사를 창건하여 최후의 적군 후백제를 대승한 것을 기념을 하면서 불위비호(佛威庇護)와 천력부지(天力扶持)를 기원하였다. 이런 정시의 이면에는 은연중 회룡고조(回龍顧祖)로 역룡배좌(逆龍背座)한 금강 이남 계룡 산세의 기운을 억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는 명산으로서의 계룡산을 중요시하지 않은 게 아니라 지리상 위점(偉點)으로 평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 연산현에 의하면 시군야, 전조태조 급아태상왕, 개욕정도지지야(是郡也, 前朝太祖 及我太上王, 皆欲定都之地也)라 하였으니 고려 태조도 계룡산 부근에 도읍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계룡산은 구곡구천과 산이 스치며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권력층보다는 평범한 선비들과 백성들에 의해서 고려때부터 도읍지로 화제에 올랐던 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조의 등극과 함께 천도설이 나돌 때 계룡산이 화제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태조 이성계가 친히 계룡산을 답사하고 이곳을 신도로 정해 공사를 하였으나, 이 지역은 국도(國都)로 부적당하다는 여러설이 나옴에 따라 일년만에 공사를 중단하게 되었다. 태종, 세종 때까지 수차에 걸쳐서 내시(內侍)를 파견하여 계룡산 신에게 산천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도 실록에 전하고, 묘향산의 상악단과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중악단을 계룡산에 세워 해마다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렇듯 계룡산은 오랜 역사속에 숭배받은 영산으로 정평이 나있는 산이다. 또한 예언적으로는 비결서(秘訣書)에 만주 곤륜산과 같은 영산으로 칭해지고 있어서 향후 계룡의 시대가 열릴 것을 만백성이 가슴에 담아왔던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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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문화체육과 > 문화관광팀 > 김윤옥
연락처 : 042-840-2402
최종수정일 : 201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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