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충신인 이심원의 정려현판이다.
이심원은 효령대군의 증손으로 학식과 문장이 뛰어났다. 성종 때 임사홍이 국권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보고 성종에게 아뢰어 파직시켜 멀리 유배시켰다.
연산군 때 다시 집권한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일으키자 이심원과 그의 가족들은 처참한 화를 당하였다가 중종 즉위 후 복원되었다.
정려문은 정면2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정려 내부에 명정 현판이외에 중수기, 정려기 등 4기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명정현판은 2칸으로 나뉘어 2기가 있다.
원래는 엄사리에 있었으나 1980년대 신도시 개발로 인해 이곳으로 옮겼다.
금암동 45번지 염선재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부인인 순천 김씨 정부인의 제각이다. 순천 김씨는 김종서의 칠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사계선생이 1631년 타계 후 부군의 3년상을 마치고 1634년(향년 62세)에 부군의 뒤를 따르기 위해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효와 열이 근본이 되었다.
광무 10년(1906년) 정부인 순천 김씨라는 칙명의 교지를 받았다.
염선재는 원래 작은 제각이었으나 1913년에 현재의 건물로 증축되어 조선말 전통가옥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